음악과 흑맥주의 나라, 아일랜드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의 거리엔 늘 음악이 흐른다. 버스커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거리를 무대 삼아 멋진 연주를 선보이고, 펍에선 매일 밤 밴드 공연이 펼쳐진다. 더블린을 벗어나 골웨이 같은 소도시를 찾아도 거리 버스킹과 펍은 흔한 풍경이다. 아일랜드는 음악과 맥주를 사랑하는 아이리쉬(Irish)가 살아가는 나라니까.
세계를 보다
글 / 사진 우지경
음악과 흑맥주의 나라, 아일랜드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의 거리엔 늘 음악이 흐른다. 버스커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거리를 무대 삼아 멋진 연주를 선보이고, 펍에선 매일 밤 밴드 공연이 펼쳐진다. 더블린을 벗어나 골웨이 같은 소도시를 찾아도 거리 버스킹과 펍은 흔한 풍경이다. 아일랜드는 음악과 맥주를 사랑하는 아이리쉬(Irish)가 살아가는 나라니까.
세인트 스티븐스 그린 공원 곳곳엔 문학가의 흉상도 설치돼 있다. 아일랜드는 제임스 조이스, 오스카 와일드, 조너선 스위프트, 예이츠 등 세계적 문호들을 배출한 나라이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유독 더블린 출신의 문학가가 많아 유네스코에서는 더블린을 ‘문학의 도시’로 지정하기도 했다.
트리니티 대학<비긴어게인>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그래프턴 거리 또 다른 끝은 조지 버나드 쇼, 새뮤얼 배케트를 배출한 트리니티 대학과 맞닿아 있다. 1952년 영국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설립한 대학으로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대학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명문 대학으로 꼽힌다. 긴 역사만큼이나 고풍스러운 캠퍼스를 뽐내는데, 그 중 백미는 트리니티 올드 라이브러리다. 길이 65m, 3층 높이의 서가를 20만 권의 장서로 가득 채운 ‘롱 룸(The long room)'이 아름다워, CNN 선정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 2위에 오르기도 했다. 롱 룸은 영화 <해리 포터> 속 배경으로 등장하며 더욱 유명해졌다.
비처럼 음악이 내리는 도시, 더블린
이소라, 유희열, 윤도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세 뮤지션이 ‘낯선 곳에서 새롭게 여행하다’ 콘셉트로 음악 여행을 떠나는 JTBC예능 프로그램 <비긴어게인>은 왜 첫 여행지로 아일랜드 더블린을 택했을까? 더블린의 중심가 그래프턴 거리(Grafton Street)에 가면, 아침부터 밤까지 기타 선율이 흐르고 버스커들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진다. 비긴어스(비긴 어게인에서 이소라, 유희열, 윤도현이 결정한 그룹)처럼 세계 각국의 밴드가 악기를 매고 버스킹을 하러 온다. 호소력 짙은 음색의 데미언 라이스도 이 거리에서 버스킹을 하며 성장했다고. 어디 이뿐인가. 전설의 밴드 U2도 더블린 출신이다. 2006년 국내 개봉, 선풍적인 신드롬을 일으켰던 음악영화 <원스>에서 남자 주인공이 버스킹을 하던 거리도 이곳이다. 아일랜드를 찾은 비긴어스 멤버들이 <원스>의 OST ‘Falling Slowly'나 U2의 ’With or Without you' 등을 준비해간 까닭이다.
고로, 더블린 여행은 일명 ‘버스킹의 성지’라 불리는 그래프턴 거리에서부터 시작해야 마땅하다. <비긴어게인>의 이소라, 유희열, 윤도현이 빚어낸 감미로운 하모니에 마음이 먹먹했던 이라면 더욱 그렇다. 수많은 행인이 활보하는 쇼핑가에 활기를 불어넣는 버스커들의 노랫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노라면 시간이 훌쩍 간다. 거리에 번지는 음악 선율에 흠뻑 취해 걷다 보면 어느새 세인트 스티븐스 그린 공원의 아치형 문 앞에 닿는다. 윤도현이 연습 삼아 홀로 기타를 치며 열창을 했던 바로 그 공원이다. 안으로 들어서면 밖과는 또 다른 세상이다. 아름드리나무가 우거진 가로수 길을 지나면 초록 양탄자를 펼쳐놓은 듯한 잔디밭에 백조와 갈매기가 함께 노니는 연못이 모습을 드러낸다.
노래하는 아이리시가 말했다. 펍에는 비가 내리지 않는다고.
후드득. 느닷없이 쏟아지는 비는 버스킹을 하러 온 음악 여행자에게 치명적이다. 한껏 준비해도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면 거리 공연을 접을 수 밖에 없다. 하루에도 몇 번씩 비가 올 듯 말 듯 찌푸린 하늘은 아일랜드를 찾은 여행자들의 애를 태운다. 이럴 땐 펍으로 스며들면 된다. 거리 공연을 미루고 왁자지껄한 펍, 앰프도 없는 작은 무대에서 마음을 다해 노래했던 비긴 어스 멤버들처럼 말이다.
더블린에서 첫날, 나 역시 비를 피해 브레이즌 헤드(The Brazen Head)를 찾았다. 1198년에 문을 연 브레이즌 헤드는 아일랜드 최고령 펍으로 꼽힌다. 자갈이 깔린 마당을 지나, 어둑한 실내로 들어서자 온기가 감돌았다. 바의 중간쯤 여행객으로 보이는 두 청년과 기네스를 마시며 신문을 읽는 노인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맥주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진한 기네스로, 식사는 고심 끝에 양고기 스튜를 주문했다.
비긴어스 멤버들도 아일랜드에 머무는 동안 흑맥주인 기네스를 즐겨 마셨다. 기네스는 1759년 아서 기네스(Arthur Guinness)가 더블린 변두리의 세인트 제임스 게이트(Saint James Gate) 양조장을 연간 45파운드에 9천 년간 빌리기로 임대계약을 맺으며 시작됐다. 아서 기네스가 자신의 이름을 딴 ‘기네스’를 내놓은 것은 포터(Porter)가 인기를 끌 무렵이다. 포터란 18세기 런던에서 유행한 흑맥주로 짐꾼(포터)들이 즐겨 마셨는데, 포터보다 강렬한 ‘기네스 엑스트라 스타우트 (Guinness Extra Stout)’가 세상에 등장하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 더블린 끝자락, 세인트 제임스 양조장 안에 위치한 기네스 스토어 하우스.백문이 불여일견. 세인트 제임스 게이트 양조장 안 ‘기네스 스토어 하우스’에 가면 기네스의 모든 것을 보고 듣고 체험해 볼 수 있다. 2층부터 본격적으로 기네스의 4대 원료인 물, 보리, 홉(Hop), 이스트(Yeast)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몰트란 보리나 밀 등 곡물의 싹을 틔워 건조한 것으로, 맥주의 색·맛·향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영국산 포터의 경우 진한 색과 맛을 위해 브라운 몰트를 쓴다. 기네스의 경우 몰트에 싹 틔우지 않은 보리를 볶아 섞어 사용해 커피 향처럼 고소한 풍미를 더했다. 기네스를 처음 잔에 따를 때 ‘딥 루비 레드(Deep Ruby Red)’ 빛깔을 띠다가 서서히 초콜릿색으로 변한 것도 이 때문이다.
4층의 기네스 아카데미에서 배우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게 기네스 따르는 법’이다. 45도 각도로 따른 후, 질소가 충분히 섞이게 2분간 가만히 두는 것이 핵심. 그리고는 나머지 부분을 보드라운 거품으로 촘촘하게 채워야 ‘완벽한 한 잔’이 완성된다. 직접 따른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기네스 한 잔은 자리에서 마셔도 되고, 이 잔을 들고 7층 그래비티 바(Gravity Bar)로 올라가 마셔도 된다. 그래비티 바는 더블린 시내를 360도로 굽어볼 수 있는 공간으로 사방이 통유리로 돼 있다. 그래서 그래비티 바에서 더블린을 내려다보며 기네스 한 모금을 마시고 있노라면, ‘캬’ 소리가 절로 난다. 그 순간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기네스를 마시는 여행자니까.
과연 바텐더가 건네준 검은 기네스엔 눈처럼 흰 거품이 약 2㎝ 두께로 소복이 덮여 있었다. 입술에 닿는 보드라운 거품에 한 번, 가볍게 넘어가는 목 넘김에 한 번 더 놀랐다. 혼자서 무언의 감탄을 하며 꿀꺽 마셨다. 그때 옆자리 노인이 바텐더에게 기네스를 한잔 더 주문했다. 서로 이름을 부르며 대화하는 모습이 단골 같아 보여 슬그머니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여기 자주 오세요?”
“자주 오느냐고? 매일 와요.”
“그럼, 올 때마다 기네스를 드세요?”
“물론이지.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엔 펍에서 기네스를 마시는 게 최고야. 아일랜드에는 이런 말이 있어요. 적어도 펍에는 비가 오지 않는다고. 허허허.”
“그것 참, 맘에 드네요!”
우리는 기네스로 동맹을 맺은 사이처럼 금세 친해졌다. 그의 이름은 비니였다. 비니 할아버지는 내게 아일랜드어로 건배를, 나는 한국어로 건배를 알려주며 술잔을 기울였다. 알고 보니 그는 브레이즌 헤드에서 아일랜드 민요를 공연하는 연주자였다. 쉬는 날이지만, 식사하러 왔다고 했다. 펍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이, 비가 멈추고 구름이 걷히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다시 비에 젖은 거리로 나설 기운이 솟았다. 그게 기네스와 따끈한 양고기 스튜로 속을 든든히 채운 덕인지, 비니 할아버지와 푸근한 수다 덕인지 헷갈렸다. 문득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가 더블린을 배경으로 쓴 소설 『율리시스』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동전 몇 푼이면 브레이즌 헤드에서 꽤 괜찮은 경험을 할 수 있지.’
비가와도 즐거운 템플바
꽤 괜찮은 경험을 뒤로하고 찾아간 리피 강변에는 어느새 어스름이 내려앉고 있었다. 도시의 불빛이 아른대는 강 위에 반지를 걸어놓은 듯 반짝이는 다리가 시선을 끌었다. 1816년에 세운 하얀 아치형 다리로, 당시 보행자들에게 1/2페니씩 통행료로 받아 하페니란 이름을 얻었다. 1919년 이후 통행료는 폐지됐지만, 하페니 다리는 더블린의 상징이 됐다. 점점 코발트 블루빛으로 짙어하는 하늘 아래 불을 밝힌 다리가 보석처럼 영롱하게 빛났다.
홀린 듯 다리를 건너 상인의 아치를 지나자 어디선가 음악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소리를 따라가자 템플 바(Temple Bar)가 나타났다. 템플 바는 유명한 술집 이름인 동시에, 리피 강 남쪽, 웨스트모얼랜드 거리부터 피쉬앰블 거리를 일컫는 지명이다. 템플 바에만 펍이 20여 개가 넘는다. 펍 사이엔 극장, 갤러리, 작은 가게들이 둥지를 틀고 있다. 80년대에 버스 터미널을 조성하려던 계획이 무산되자 음악가, 연극배우, 화가들이 모여들며 문화와 예술의 거리로 변모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는 그칠 줄을 몰랐다. 촉촉이 젖은 밤거리, 한 밴드가 마치 <비긴어게인>의 한 장면처럼 진심 어린 공연을 펼치고 있었다. 몰려든 사람들도 우산 따윈 잊은 채, 리듬에 맞춰 발을 구르고 손뼉을 쳤다. 그렇게 거리의 음악가와 관객, 하루를 마무리하며 펍을 찾는 더블린 사람들, 여행자들이 한데 모여 떠들썩한 축제 분위기였다.
버스킹이 끝날 무렵, 어느 펍에선가 아일랜드 민요가 흘러나왔다. 문을 열자 펍 안은 귀로는 음악을, 입으로는 기네스를 즐기는 이들로 꽉 차 있었다. 음악이 흐르는 더블린의 밤, 비가와도 흥겨웠다. 적어도 펍에는 비가 내리지 않으니까.
글 / 사진 우지경
우지경은 여행지에서 낯선이에게 말걸기를 좋아하는 여행작가다. 그녀는 아일랜드를 비와 음악, 흑맥주를 사랑하는 이라면 꼭 가봐야 할 곳으로 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