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 서리가 하얗게 내렸다. 농부들 맘은 조급해졌다. 뒤란에 와르르 쏟아진 은행은 물론이고 콩이며 감 등 남은 곡식과 과일을 거둬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날 잡아 배추를 짚으로 묶어주는 일도 잊으면 안 된다. 무는 단맛을 채우면서 굵어가고 아낙들은 포구를 어슬렁거리며 젓갈준비를 한다. 황석어젓을 달여 놓으며 까나리액젓, 새우젓, 조개젓 등이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비법으로 만들어진다. 나 역시 서리 두어 번만 더 내리면 김장을 할 참이다.
계절 밥상 여행
한 해 묵힌 게국에 갈배추 버물버물
태안 ‘게국지’
글/사진_손현주(음식 칼럼니스트)
▲ 태안 아낙들이 조개를 긁기 위해 바다 둔덕 상펄로 걸어가고 있다.
▲ 바닷물이 빠진 갯벌에서 굴을 쪼고 있다.
한데 태안 아낙들은 1년 내내 ‘겟국(게를 넣고 끓인 국)’을 모으며 ‘김장 그 후’를 기다린다. ‘그 후’라는 것이 밭에는 허접한 갈배추뿐일 텐데 왜 사내들은 막걸릿잔 상상을 하며 빈 밭에서 시래기를 줍고 아낙들은 연중 겟국을 모을까. 태안이 감춰 둔 그 맛은 대체 무엇일까. 그들에게 게국지는 과거부터 내려온 어머니의 향수이자 냄새만으로도 알아채는 유전자 같은 음식이다.
김장철 갈배추를 이용,
1년동안 모은 겟국으로 간을 하여
만든 태안 토속음식 게국지.
▲ 우럭을 사나흘 말려 쌀뜨물 넣고 끓여낸 우럭젓국. 시원한 국물 맛이 일품이다.
태안군은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사철 해산물이 풍부하다. 싱싱한 갯것을 즉석에서 굽거나 끓여 먹기도 하지만 냉장고가 보편화되지 않았을 때에는 천일염 툭툭 뿌려 말리거나 염장을 했다. 그래서 태안에서 흔한 꽃게나 박하지(돌게), 능쟁이, 농게를 소금물에 담가 게장으로 먹곤 했다.
본래 태안군에서의 전통 꽃게장에는 간장을 넣지 않았다. 대체로 고춧가루를 빨갛게 이겨 즉석에서 담근 ‘무젓’을 즐겼다. 재료가 싱싱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꽃게는 장맛이 든 간장게장만 한 것이 없다. 하지만 양조간장이 나오기 전, 집간장(조선간장)은 귀했고, 미역국을 끓이거나 나물 무칠 때 아껴 넣을지언정 헤프게 게장을 담가 먹을 생각은 꿈도 못꿨다.
해서 태안에서는 천일염으로 소금장을 만들었다. 짭조름하게 간을 맞춘 소금물을 설설 살아 움직이는 꽃게에 부었다. 사나흘 지난 후 게에 간이 배면 소금장 국물을 빼내 와르르 끓인 후 완전히 식혀 다시 꽃게에 붓는다. 두어 번 반복하면 게장은 맛이 든다. 지금 간장게장에 비하면 짜고 비렸다. 하지만 이 곳에서는 흔하게 먹는 밥반찬이었고, 밥도둑이었다.
▲ 우럭을 사나흘 말려 쌀뜨물 넣고 끓여낸 우럭젓국. 시원한 국물 맛이 일품이다.
꽃게를 담갔던 소금장은 버리지 않고 재사용했다. 다시 게장을 담글 때 소금 한 줌 더 넣고 간을 맞춰 끓인 후 식혀 부었다. 연중 달이고 끓이고 부으면서, 색이 진해졌다. 10월, 가을 꽃게 때부터 시작된 이 소금장은 달여서 다음 해 진달래 필 때, 장이 노랗게 밴 암꽃게에도 부었다. 여름은 꽃게 금어기다. 이때는 갯벌에서 잡은 황발이, 즉 농게에 이 겟국을 부었다. 밥맛 없는 여름철엔 최고의 반찬이었다. 게 맛을 아는 태안 사람들은 말한다. “감히 꽃게를 농게 맛과 어찌 비교한대유.
담백하고 고소한 농게 게딱지는 천하일미다. 여름날, 어머니가 ‘일품’ 게딱지 내장을 내 밥수저 위에 올려주기만을 바랐다. 고만고만한 자식들이 수저를 들고 게를 먹는 풍경은 흔한 모습이었다. 여기에 능쟁이, 칠게가 ‘2품’이면 꽃게는 미안하게도 ‘3품’이다. 이렇게 달여 붓기를 반복하는 동안 소금장에는 게에서 빠져나온 온갖 미네랄과 칼슘, 아미노산이 고스란히 녹아든다. 이게 바로 그 겟국이다.
▲ 게국지를 담글 때 도굿대로 콩콩 찧어 넣는 능쟁이.
늦가을, 모양 좋은 배추는 포기김치를 담그고 우거지와 밭에서 뒹구는 갈배추를 거둬들일 차례다. 갈배추는 머리만 툭툭 쳐서 함지박에 넣고, 노랗게 익은 호박 착착 썰고, 덜 익은 끝물 고추와 마늘, 생강을 갈아 겟국에 간을 한다. 능쟁이가 있으면 으깨 넣고 새우젓을 더 넣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허드레 배추와 겟국을 넣고 아무렇게나, 막 버무린 김치가 본래의 태안 게국지다. 사나흘 지나 간이 배면 냄비에 담아 보글보글 지져 먹는다. 짭조름한 겟국의 묵은 맛과 호박의 달달한 풍미, 간이 슬쩍 든 배춧잎의 달고 시원한 맛이 한데 어우러져 기막힌 김치 맛을 낸다. 금방 지져 먹어야 질기지 않다. 좀 짜게 담가 보관한 뒤 늦봄 곰 삭았을 때 지져 먹는 맛 또한 특별하다.
▲ 능쟁이, 갈배추, 새우 등을 넣고 전통방식으로 담가놓은 게국지김치.
▶ 전통방식의 게국지 찌개. 제대로 만든 게국지를 만나기 쉽지 않다.
게국지는 쌀뜨물을 부어 아궁이 잔불로 자글자글 익혀 먹기도 하지만 향수를 떠올리는 옛사람들은 가마솥에 찐 게국지가 으뜸이라고 말한다. 밥이 우르르 끓으면 양재기에 이 김치를 담고 솥 귀퉁이에 넣어둔다. 그러면 적당히 들어간 밥물로 살포시 익어 부드럽고 간이 잘 맞는 게국지가 된다. 밥 한술 떠서 시래기 쭉쭉 찢어 숟가락에 얹으면 어떤 음식이 부럽지 않다. 이 게국지와 비슷한 것이 내포(예산, 당진, 서산을 일컫는 말) 쪽 ‘우거지 김치’다. 김장을 한 함지박 그릇에 시래기를 넣고 남은 양념으로 그릇을 씻어내듯 버무려 금이 간 항아리에 넣어 둔 김치다. 좀 짜게 담가 봄에 먹는다. 봄볕이 들면 시래기엔 곰팡이가 하얗게 꽃처럼 핀다. 그런데 이 냄새 지독한 시래기를 지져먹는 맛이라니. 항아리 위쪽의 두어 포기는 걷어내고 폭 삭은 김치를 꺼내면 군둥내 때문에 온 동네가 웅성거렸다. 이 우거지 김치는 사람 손이 닿으면 금방 삭기 때문에 항아리를 여는 즉시 이웃들과 나눠 먹어야 한다. 요즘 주거환경에서는 냄새 때문에 만들기 힘들지만 옛사람들의 지혜가 담긴 건강한 발효식품이다.
어떤 음식이든 방송을 타면 소란스러워진다. 게국지도 마찬가지여서 태안을 여행하다 보면 식당마다 온통 게국지 간판을 내걸고 있다. 김치에 꽃게나 대하를 넣어 김치찌개처럼 끓이거나 해물탕처럼 내놓는 ‘유사 게국지’가 대부분이다. 1년 삭힌 게국을 구하기 힘들뿐더러 요즘 사람들이 간이 센 옛 게국지의 발효된 맛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치냉장고가 생기면서 김장이 일러졌다. 그러나 여전히 서리 먹은 무와 배추가 달기 마련이고 김장은 추울 때 해야 제 맛이다. 단 맛이 밴 무를 채쳐서 해팥을 삶아 무시루떡을 하던 날, 그날은 곧 김장하는 날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김장이 끝난 후 태안 게국지를 만들던 일상. 삭혀 군내나는 과거의 음식들이 식탁에서 사라져가니 아쉽기만 하다.
심하게 편두통 앓던 어느 겨울 날. 뜨끈하게 끓여낸 게국지 한 사발로 힘을 얻었던 적이 있다. 바닷바람이 허름한 천막을 들추며 솨솨 소리를 내며 들어왔고, 몸 굽은 할매가 비척거리며 끓여주던 영혼의 음식. 그 오랜 기억 속의 게국지가 그리운 계절이다.
<태안 계절 맛집>
‘솔밭가든’(안면도 041-673-2034, 게국지, 우럭젓국 정식),
‘승진횟집’(안면도 041-673-3378, 우럭 미역싱건탕),
‘해송꽃게집’(안면도 041-673-5363, 게국지),
‘토담집’(태안시내 041-674-4561, 우럭젓국, 간장게장),
‘향토꽃게장’(태안시내 041-674-5591, 우럭젓국, 간장게장),
‘진국집’(서산시내 041-665-7091, 게국지 백반)
글을 쓴 손현주는 음식 칼럼니스트이자, 여행 작가 겸 사진가로 20년간 잘 다니던 신문사에 홀연히 사표를 내고 2010년 안면도로 귀향했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집에서 글을 쓰고 섬을 떠돌며 사진을 찍는다. 그녀는 앞으로도 꾸준히 책을 읽고 쓰며 사진을 찍는 삶을 꿈꾼다. 지은 책으로는 신작 『열두 달 계절 밥상 여행』을 비롯하여 『와인 그리고 쉼』, 『태안 섬 감성 스토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