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구에서 막창구이가 많이 알려져 있다.
계절 밥상 여행
팥잎무침과 콩잎 장아찌가 있는 토속밥상
대구 ‘한정식’
글/사진_손현주(음식 칼럼니스트)
▲ 대구 팔공산의 비로봉, 서봉, 동봉 등 주변을 두루 조망하기 좋은 신림봉 탑 주변
대구에서 계절밥상을 잡아내기는 참 어렵다. 다들 맛있는 집이 별로 없다고 했다. 해서 매번 대상에서 제외하곤 했다. 그러나 이번에 경험한 대구는 달랐다. 전통을 오래 지켜온 집들이 내놓는 대구만의 토속음식들이 그 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물론 일부 정갈한 한정식은 인근에 있는 안동 음식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니 대구의 음식을 맛봐야 미식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 어떻게든 넣고 싶었다. 여름과 가을, 두 번에 걸쳐 대구를 방문하며 맛의 줄기를 찾으려고 애썼다. ‘대구’하면 납작 만두와 막창, 육개장, 따로국밥, 생고기(뭉티기), 동인동 매운찜갈비 등 몇 가지 음식들을 주로 언급하지만 난 이보다 대구 사람들이 즐겨먹던 밑반찬이 무엇인지가 더 궁금했다.
“어떻게 왔어요?”
“네?”
“우리 집은 예약 안 하면 밥 못 먹어요”
“......”
“두 분이죠? 1인분에 2만5천원입니다. 오늘은 모르고 오셨으니 방으로 들어가세요”
▲ 금방 삶아내온 청맥식당 분홍색 수육.
▲ 대구 청맥식당 김정숙할머니 손. 지금도 음식은 할머니의 손을 거친다.
경상도 여인들 화끈한 줄은 알았지만, 밥 먹으러 온 사람 보고 왜 왔냐고 다그치니 솔직히 적잖이 섭섭했다. 이 집을 가게 된 것은 차(茶)를 좋아하는 대구 토박이이자 미식가인 지인의 추천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찾을 수 없는 팥잎무침을 먹을 수 있다고 했으니, 무조건 찾아가야겠다고 별렀다. 그런데 처음부터 퉁명스러운 할머니에게 휘둘리고 나니 순탄하지 않을 것 같아 어쩌나 싶었던 것은 사실이다. 음식은 감정이어서 아무리 맛있어도 기분이 뭉그러지면 수저를 놓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음식이 하나둘 나오는 걸 보고 기분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날렵하게 썰어낸 편육이 먼저 나왔다. 희고 핑크 빛이 돈다. 최소한 삶아놓고 계속 데워서 내놓지는 않는다고 여겼다. 육젓과 간장, 양념 안한 집된장, 마늘 장아찌가 나온다. 육젓에 고기를 얹어 먹으니 담백하고 누린내가 없다. 이번에는 직접 쑨다는 큼지막한 손두부와 함께 김장김치다. 내가 먹어 본 김치 중 3대쯤에 들어간다고 해야 할까. 조금 센 듯한 간과 젓갈의 깊은 맛, 아삭하게 씹히는 배추의 식감까지 최상의 조건을 보여주니 제대로 찾아왔다.
“어떠냐”고, 손님의 표정을 살피러 들어 온 주인 김정숙 씨를 붙잡아 앉혀두고 비결을 묻기 시작했다.
“요즘 김장들을 일찍 하는데 우리는 꼭 12월에 김장을 해요. 좀 넉넉하게 해서 다음 해까지 씁니다. 멸치젓, 새우젓, 황석어젓, 갈치젓 등 생젓과 액젓을 섞어서 쓰는데 모두 8가지가 들어가요. 우리는 겨울에 김장을 하는데 새벽 4시에 일어나 배추를 절여요. 점심 무렵 씻어서 바로 양념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 1년을 먹는 우리 집 보물이에요.”
이게 바로 김씨가 36년간 고집스럽게 지켜온 기본 맛이다. 재료의 시기와 양념의 어울림, 만들어내는 시간까지 집요하고 꼼꼼하게 살피는 것이 바로 맛의 핵심이 아닐까 싶었다. 정신없이 김치 한 보시기를 비우는 사이 단정하게 부친 고추장떡이 나오고, 소 양이 썰어서 한 접시 상에 올랐다. 그리고 기대했던 팥잎 무침이 놓였다. 삭힌 콩잎과 가죽나무 장아찌까지 놓이니 “이거다” 싶다. 일어서려는 할머니를 다시 앉혀놓고 다짜고짜 묻기 시작했다. “팥잎을 삶아서 된장과 고추장, 마늘만 넣고 무쳐. 참기름 안 써. 시골 장에 겨우 부탁하여 만드는 거지. 이거 요즘엔 못 구해. 콩잎도 마찬가지고. 맛 비결이 뭐냐고? 모든 음식은 다싯물이 맛있어야 하는데, 좋은 멸치를 제대로 써야 해”
▲ 된장과 고추장, 마늘로 무치는 팥잎무침.
▲ 소금물에 삭혀서 만든 콩잎장아찌. 흰 밥에 싸먹으면 밥도둑이 따로 없다
▲ 고등어를 한솥 끓여 식히고 있는 청맥식당 수돗가풍경.
안동식해 맛이 나는 핑크 빛 물김치에서는 향긋한 생강 냄새도 났다. 된장으로 졸인 고등어조림과 불 맛이 밴 불고기 또한 제대로다. 매년 2월에 280킬로그램의 굴을 사서 1년 치를 담근다는 굴젓은 짜고 맵지만 잘 삭아서 독특한 풍미를 자아냈다. 무엇보다 콩잎을 밥을 싸서 먹는 재미가 여간 좋은 것이 아니다. 밥알이 고슬고슬 살아있다. 지금도 그때그때 냄비밥을 고집한다고 한다. 방문을 열고 손가락으로 짚어 보여주는 장독대에는 된장과 고추장이 가득 들어 있다고 하니 더럭 믿음이 간다.
김치를 두 보시기나 비우고 욕심이 생겨 김치 광까지 엿보았다. 마당 한 번 참 깨끗이 쓸어놓은 집이다 싶었는데 김치광에서 부엌까지 반들반들 정갈하기 그지없다. 자신의 음식에 대한 자신감, 그래서 당당하게 예약을 요구하는 주인, 어느 접시 하나도 뒤지지 않는 맛의 밸런스가 대구의 힘을 읽게 하는, 아니 음식에서 선(善)을 읽게 했다.
▲ 대구 명물 납작만두. 살짝 쪄서 팬에 구워낸다.
관광객이라면 노래와 벽화를 따라 ‘김광석 다시그리기 길’을 거닐게 되는데, 혹시 그 근처에서 괜찮은 쇠고기 식사를 하고 싶다면 ‘대한뉴스’를 불쑥 들어가 보기를 권한다. 전국에서 수배해 온다는 ‘투뿔등심’을 20일 이상 저온 숙성하고, 내올 때는 토치를 이용한 고량주 불 쇼를 보여준다. 냄새도 안 나고 고기의 질 또한 제법 괜찮다. 먹고 난 후 쇠고기를 다져 넣은 된장찌개에 밥을 바글바글 끓여 먹는 것도 별미다.
대구에 왔으니 간단하게 주요 음식 얘기 해볼까 한다. 대구에는 해장국으로 좋은 따로국밥이 널리 알려져 있다. 밥과 국을 따로 준다고 하여 붙은 이름으로 독특한 대구식 입맛을 잘 보여준다. 소 뼈를 12시간 이상 고은 다음 그 국물에 고춧가루, 파, 부추, 마늘 등을 넣고 다시 끓여낸다. 매운맛 속에 푹 익은 파의 감미가 부드럽고 달달하다. 선지가 많이 들어있어 선지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미리 빼달라고 말해야 한다. 여기에 수성고량주 한 잔 곁들여도 좋겠다.
대구에 가면 조선 3대 시장 중 하나였다는 근대골목투어 기점 서문시장을 꼭 들려봐야 한다. 시장통을 돌며 분식으로 요기를 하는 재미가 크기 때문이다. 특히 납작만두를 맛봐야 한다. 당면 만두를 전처럼 납작하게 빚어 살짝 찐 것을 팬에 기름맛 나게 후다닥 구워낸 것이다. 연기 폴폴 나는 팬 옆에서 대구 사람들 정말 맛나게들 먹는다. 만두 위에는 송송 썬 대파를 얹어주는데, 그 위에 고춧가루와 간장을 뿌려 먹는다. 또 쫄면이나 우동과 같이 시켜 먹기도 한다. 짜고 매운 대구의 맛인데 돌아서면 다시 생각날 정도로 중독적이다. 본점은 서문시장 옆 큰길가에 있고 인근에 주차장도 있다.
▼ 파와 고춧가루, 간장을 뿌려 먹는 납작만두. 꼭 먹어봐야할 명물이다.
▲ 대구의 관광명물이 된 '김광석다시그리기길'. 포토존으로 인기가 높다.
<추천 맛집>
‘청맥식당’(053-421-9900, 한정식, 예약필수),
‘12 Kitchen’(053-652-8007, 이태리음식, 예약필수),
‘미성당 납작만두’(서문시장 본점, 053-255-0742, 납작만두, 쫄면),
‘마루막창’(수성연못 옆, 053-763-3003, 소막창),
‘국일따로국밥’(053-253-7623, 따로국밥)
글을 쓴 손현주는 음식 칼럼니스트이자, 여행 작가 겸 사진가로 20년간 잘 다니던 신문사에 홀연히 사표를 내고 2010년 안면도로 귀향했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집에서 글을 쓰고 섬을 떠돌며 사진을 찍는다. 그녀는 앞으로도 꾸준히 책을 읽고 쓰며 사진을 찍는 삶을 꿈꾼다. 지은 책으로는 신작 『열두 달 계절 밥상 여행』을 비롯하여 『와인 그리고 쉼』, 『태안 섬 감성 스토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