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녀온 사람이라면 단언컨대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가장 진한 색으로 남아있을 여행지, 이탈리아 남부. 어떻게 이리도 예쁘게도 만들어 모든 이들이 헤어 나올 수 없는 사랑에 빠지는지 매번 경탄을 금치 못하며 가파른 언덕길과 울퉁불퉁한 돌길을 경쾌한 스텝으로 뛰어다니게 만든다.
장화 모양을 닮은 이탈리아반도의 발등 즈음에 위치한 서남부 해안가는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도시를 이루고 살아 역사가 오래됐으며 럭셔리한 휴양지로 각광받아 왔다. 탐스럽게 열매를 맺은 레몬 나무들이 무성하고, 뛰어들고 싶은 해변들과 아페롤 Aperol로 만드는 여름 칵테일 스프릿츠 Spritz가 갈증을 시원하게 해소시켜주는 이 지역에서 노래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이름난 한국의 가수들이 바다를 건너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낯선 이들 앞에서 거리 공연을 펼치는 ‘비긴어게인’ 촬영지로는 더없이 적합하다. 성황리에 종영한 세 번째 시즌 촬영지였던 이탈리아 남부를 지금부터 여행해보자.
소렌토 Sorrento
무엇이든 '처음'과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큰 힘을 지닌다. 용기를 북돋아 주기도 하고, 필요 이상의 마음을 주게 만드는 아쉬움을 자아내기도 한다. 박정현과 하림, 헨리, 수현, 김필, 임헌일까지 걸출한 뮤지션들이 JTBC '비긴어게인3'의 버스킹 공연을 시작하고 마무리한 곳은 바로 이탈리아 남부의 소렌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경이라 손꼽히는 아말피 해안가 여행을 시작하는 동네이기도 하다. 아말피 해안가 그 어떤 동네도 도시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아기자기한데 소렌토는 보트와 버스 등 교통편이 가장 잘 발달되어 있다.
소렌토 관광의 중심지 타쏘 광장
김광석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첫 곡으로 선곡한 것에 적잖이 놀랐다. 내가 경험한 소렌토의 모든 날들은 바람 한 점 불지 않고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도 차마 고개를 들어 마주하기 어려운 아찔한 태양이 내리쬐는 날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행지는 모든 여행자에게 제각각이고, 같은 여행자라도 찾을 때마다 다르다. 소렌토는 세찬 비바람으로 비긴어게인3 버스커들을 맞았다.
햇살이 눈 부신 곳 그곳으로 가네
바람에 내 몸 맡기고 그곳으로 가네
출렁이는 파도에 흔들려도 수평선을 바라보며
햇살이 웃고 있는 곳 그곳으로 가네
담담한 듯 감정을 눌러 담고 부르는 김광석의 목소리도 바람에 실려 와 버스커들의 열창에 동참하는 듯했고 처음 맞추어 보는 하모니는 조심스러우면서도 아름다웠다.
이탈리아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는 것을 최대한 어렵게 만들 심산이었는지 비긴어게인3 마지막 무대도 소렌토였다. 해안가와 시내가 모두 내려다보이는 아찔한 뷰의 루프탑에 자리를 잡고 노래하며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박정현의 손끝에서 미세한 떨림을 느꼈다. 떠나는 아쉬움과 머무를 수 있었던 감사함, 아끼지 않고 보내주었던 낯선 이탈리아인에게 느끼는 고마움이 무한히 교차하는 3분 남짓은 길고도 짧은 시간이었으리라.
나폴리 산타루치아 Napoli Santa Lucia
맑은 날이 허락하는 한 끝없이 걷고 싶은 나폴리 항
델 오보 성을 뒤로하고 즉흥 버스킹을 했던 나폴리의 산타루치아 항은 호주 시드니와 브라질의 리우 데 자이네루 Rio de Janeiro와 더불어 세계 3대 미항으로 꼽히는 곳이다. 실제로 보면 오페라 하우스와 하버 브릿지가 있는 시드니 항이나 우뚝 솟은 높이 해발 396m의 돌산과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거대한 예수상이 보이는 리우 데 자이네루 항과는 또 다른 매력을 보인다.
도시 곳곳에 나침반처럼 솟아 있는 오보 성, 누오보 성, 산트 엘모 성을 제외하고는 높은 건물이 없어 끝없는 지평선에 눈을 두고 한없이 걷기에 좋다. 유럽에서 가장 바쁜 항구 중 하나지만 탁 트인 시야 덕분인지 발착하는 배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SITA 버스나 사철보다는 보트로 소렌토, 아말피를 찾는 것이 좋은 이유다. 바다는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으니까. 아무리 잔잔해도 오르락내리락하는 파도는 늘 있고, 매 순간 변한다.
라벨로 Ravello
라벨로는 아말피 해안 일대에서 바다와 가장 멀리 떨어진, 울창한 나무들 사이에 자리한 작은 산지 마을이다. 연중행사로 열리는 바그너 음악 축제로 유명한 음악의 마을로, 저지대 계단식 포도밭을 버스 창문 너머로 감상하다 보면 아말피에서 금세 도착한다.
D.H. 로렌스의 소설 <채털리 부인의 연인>, 바그너의 대표작 중 하나인 오페라 ‘파르시팔’을 완성한 곳으로 유명한데, 파르시팔의 영감이었던 빌라 루폴로 Villa Rufolo와 은막의 스타 그레타 가르보가 연인과 사랑의 도피를 했던 빌라 침브로네 Villa Cimbrone, 이 두 건축물이 라벨로의 주요 볼거리다. 침브로네는 현재 호텔로 개조되어 낭만적인 밤을 지내고 가기에도 좋다.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무한한 테라스’가 침브로네의 상징이다.
아말피 Amalfi
체레토 산 Monte Cerreto 아래 물리니 Mulini 계곡에 자리 잡은 천혜의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아말피는 항구 바로 옆에 해변이 있어 보트에서 내리자마자 신발을 벗어 던지고 바다로 뛰어들게 하는 사랑스러운 마을이다.
해변에 점점 가까워질 수록 심장은 더 빨리 뛴다.
몇 걸음만 걸어 들어가면 아말피를 대표하는 산트 안드레아 성당 Cattedrale di Sant’Andrea과 시가지가 모습을 나타낸다. 이웃 마을에 비해 눈에 띄는 특징은 바로 종종 보이는 제지 관련 상점. 아말피를 대표하는 특산물은 바로 ‘종이’다. 작지만 개성 있는 종이 박물관도 있고, 질 좋은 종이에 캘리그래피나 그림을 그려 판매하는 예술상이나 다이어리, 책 등을 판매하는 문구점이 꽤 있다.
성당 앞에서 비긴어게인3 버스커들이 불렀던 오 솔레 미오 O Sole Mio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민요인 칸초네다. 많은 나라를 여행하며 느낄 수 있는 점은 경제와 정치의 발달이 빠른 북부와 달리 바다를 면한 남부는 개성과 전통이 강하고 사람들이 한결 더 여유 있고 열정적이라는 것이다. 이탈리아는 이 공식이 딱 들어맞는 나라다. 에스프레소 맛도 밀라노에서 베네치아, 피렌체와 로마를 거쳐 나폴리에 도달하면 훨씬 더 진해지고, 피자도 파스타도 몇 배는 더 맛있으며, 동네 목청 좋은 누군가가 기분이 좋아 큰 소리로 흥얼거리는 오페라와 칸초네 가락은 길가다 이따금씩 들을 수 있다.
숨을 죽이고 보는 공연도, 끝나지 않는 기립박수도 좋지만 가장 성공적인 버스킹은 관객과 하나되는 것이 아닐까. 아말피의 오 솔레 미오 밤 공연은 그래서 황홀했다. 가창력을 평할 생각은 모두 잊고, 낯선 이들이 부르는 익숙한 노래에 목소리를 더해 함께 열창했다.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글/사진_맹지나
여행작가와 작사가, 유튜브 크리에이터를 겸하는 맹지나는 12년 동안 음반을 준비하다 대학을 졸업하며 <이탈리아 카페여행>의 출간을 계기로 여행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여름과 크리스마스, 알프스와 같이 좋아하는 것들을 테마로 삼아 오래 머무는 여행을 좋아하며, 스물두 권의 책을 출간했다. 떠나지 않을 때에는 늘 그다음 여행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