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 밥상 여행
삶이 허기질 때, 달큰한 뚝배기
안동 선지해장국
글/사진_손현주(음식 칼럼니스트)
안동을 들른 것은 순전히 해장국 한 그릇 때문이었다. 속이 허전할 때, 사는 것이 시큰둥할 때 김 모락모락 올라오게 끓여내는 할머니 해장국 한 그릇의 미망은 컸다. 한국인에게 고깃국과 밥, 뜨끈한 탕반(湯飯)만한 향수가 있을까. 양반의 도시, 안동의 풍모를 잃지 않은 시장통을 엿보는 재미도 좋지 않은가.
안동중앙신시장은 그야말로 제사상을 넓게 펼친 모습이다. 한 마리를 통째로 삶아내는 문어(몸체에 먹물이 들어있어 선비들이 문어라고 부르며 제사상에서 빼놓지 않는다고 함)와 편을 떠 놓은 돔베기(상어고기), 깨소금을 하얗게 뿌려놓은 가오리찜, 기지떡, 각종 전과 편이 시장 안에 그득하다. 특히 동해에서 올라오는 문어는 안동과 영주에서 많이 소비되는데 그래서인지 문어 다루는 집들이 많다. 문어는 삶는 방식에 따라 맛이 달라져 수십 년 단골들을 끌고 다닌다. 또 안동에서는 제사 후 각종 전과 고기들을 넣고 끓이는 잡탕찌개라는 음식이 있다. 여기에 돔베기가 빠지면 섭섭하다. 이런 문화적 이유들이 과거를 녹여가며 지금 안동의 시장을 이어가고 있다.
◀ 양반고장 안동의 재래시장은 온통 제수음식들로 가득하다.
선비의 상징인 문어를 상에 올리므로 문어 삶는 가게들이 많다.
난전에 지붕을 얹어 현대화시킨 안동중앙신시장 통로를 느리게 걸어본다. 못 보던 식재료를 만나면 무엇인지 묻고 한 입 얻어먹는 재미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 안동 중앙시장에 있는 옥야식당 앞. 설설 끓는 국물솥과 선지통이 있고 오전부터 손님들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신시장 통로에는 대한민국 최고의 해장국집으로 손색없는 ‘옥야식당’이 있다. 물론 의령의 ‘종로식당’ 해장국도 만만치 않지만 이 집의 국물은 강하지 않으면서 스며들 듯 먹게 되는 중독성 때문에 자꾸만 찾게 된다. 50년 전통이라는 푯말보다 더 뜨끔하게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입구에 놓인 선지통이다. 노끈 손잡이가 달린 붉은 플라스틱 양동이 여섯 개에는 붉은 선지가 가득 담겨 있다. 금방 들어온 모양이다. 역겹고 보기 사납다. 하지만 지나가는 사람들도 식당으로 들어가는 사람들도 모두 당연한 풍경으로 여긴다. 그 옆엔 다듬어서 토막 낸 대파가 상자째 쌓여 있다. 이 집의 큰 비법 재료 두 가지를 엿본 셈이다. 통로 밖 가마솥에서 국이 설설 끓는다. 그런데 안쪽에도 솥이 있다. 내부의 것은 건더기를 담아 토렴한 뒤 뚝배기에 최종 국물을 담아내는 솥이다.
백발의 주인 할머니는 흐트러짐 없이 벽 쪽을 바라보며 고기를 썰고 있다. 애석하게도 잘된다는 시골 선지국밥 집들은 대부분 청결하고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그것이 기묘하게도 시원한 국물 맛 하나로 다 용서된다.
▲ 백발의 주인할머니가 뚝배기에 들어갈 고기를 썰고 토렴을 한다.아침과 저녁 시간에는 장사를 안 하는 데다 점심시간 즈음에 가면 줄을 서야 하니 점심 앞뒤로 여유를 두고 가는 것이 좋겠다. 시장에 물건을 사러 온 안동 노인들이 이른 점심을 먹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포장손님도 제법 많다. 할머니에게 인사하며 멀리 섬에서 왔노라고 하니 국물을 담고 있는 직원에게 “야야, 이 손님 고기 넉넉히 넣어줘라”하고 덕담을 한다. 시골 인심이 남아있는 집이다.
▲ 파와 선지를 듬뿍 넣어 들큰하게 시원하게 끓여낸다.
손님 많은 시간을 피해 왔는데도 빈 자리가 없다. 기다렸다가 2층 다락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해장국은 금방 나왔다. 보기에는 평범한 국밥이다. 밥과 국 따로 나온다. 종지에 담긴 다진 마늘과 고춧가루를 넣고 숟가락으로 저어 국물부터 떠 먹어본다. 강하지 않고 시원하다. 한우 등뼈 육수를 뽑아내 배추와 대파, 선지가 듬뿍 들어간 국물은 간과 농도가 적당하며 감미가 느껴지고 부드럽다. 선지 덩어리가 큼직큼직하다. 할머니가 입구에서 썰던 양지와 아롱사태가 여러 점 들어 있다. 고기도 질기지 않고 잘 녹아 든다. 다져 얹은 청양고추가 다소 밋밋할 수 있는 국물 맛을 매콤하게 잡아준다. 건더기를 건져 먹다가 아예 밥을 말아 버렸다. 국에 밥을 말면 국물 맛이 싱거워져서 끝까지 맛있게 먹을 수 없어 선호하지 않는데, 어쩐지 이 집은 밥을 말아 허겁지겁 먹어야만 할 것 같았다. 빼어나진 않지만 잘 익은 깍두기는 먹을 만 하고 간장에 삭힌 고추도 좋다. 마지막 한 수저까지 쪽 비우고 나니 세상일에 아무 두려움이 생기지 않는다. 그런 것이다. 국밥 한 그릇에 우리는 정체성을 찾고 기운을 얻고 펄펄 날아갈 용기를 얻는다.
▲ 가을 청량사를 돌아보는 재미도 크다.
원래 안동하면 간고등어나 헛제삿밥이 유명하다. 그러나 사실 안동은 한우도 그 못지않게 유명하고 육류에 상당히 강하다. 안동역 쪽으로 가면 가격과 질 모두 좋은 갈비살 구이 집이 있다. 두툼한 찰떡에 팥떡을 붙여서 한입 베어 물면 벙어리처럼 버버거린다는 ‘버버리 찰떡’을 간식으로 먹었다. 또 최근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안동찜닭’도 좋았다. 안동 구시장쪽에는 찜닭 골목이 있다. 좁고 낙서투성이인 다락방에 쪼그리고 앉아 달달한 닭찜을 뜯는 것도 안동여행의 한 축이다.
▲ 안동-인근 군위에 있는 삼존불.
<안동 추천 맛집>
‘옥야식당’(중앙신시장내, 054-853-6953, 선지국밥과 육개장),
‘거창숯불갈비’(안동역앞, 054-857-8122, 한우갈비, 갈비찜),
‘버버리찰떡’(옥야동, 054-843-0106, 팥과 깨, 콩고물 찹쌀떡, 안동식해)
글을 쓴 손현주는 음식 칼럼니스트이자, 여행 작가 겸 사진가로 20년간 잘 다니던 신문사에 홀연히 사표를 내고 2010년 안면도로 귀향했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집에서 글을 쓰고 섬을 떠돌며 사진을 찍는다. 그녀는 앞으로도 꾸준히 책을 읽고 쓰며 사진을 찍는 삶을 꿈꾼다. 지은 책으로는 신작 『열두 달 계절 밥상 여행』을 비롯하여 『와인 그리고 쉼』, 『태안 섬 감성 스토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