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경한 도시의 이국적인 풍광, 눈이 마주치면 인사를 건네던 사람들, 문득 심장을 파고 든 파두 선율, 그렇게 말이 통하지 않아도 진심을 나누었던 순간들. 추억에도 온도가 있다면 포르투갈의 햇살만큼 따뜻하리라. 이베리아 반도의 서쪽 끝, 포르투갈에서 보낸 시간은 그리움이 되어 가슴 안에 강처럼 흐르고 있다.
세계를 보다
‘비긴어게인2’의 여정을 따라
유럽의 서쪽 끝, 포르투갈을 가다
글 / 사진 우지경
버스킹 여행의 무대가 되어준 포르투갈
‘낯선 곳에서 새롭게 노래하다’를 슬로건으로 내건 JTBC 음악 예능 <비긴어게인2>. 서유럽의 끝, 포르투갈을 배경으로 버스킹 향연을 펼쳤다.
김윤아-이선규-윤건-로이킴 팀은 포르투에서 시작해 카스카이스를 거쳐 리스본에서 한편의 로드무비 같은 음악 여행을 선보였다. 그런가 하면 박정현-하림-헨리-수현 팀은 리스본의 언덕과 골목을 누비며 깊은 여운이 남는 버스킹을 보여줬다. 포르투, 리스본의 거리와 한국 가수들의 노래가 이토록 잘 어우러질 줄이야. 아름다운 풍경은 무대가 되고 햇살은 조명이 되고 소탈한 포르투갈 사람들은 흥겨운 관객이 되었다. 그렇게 화면 가득 낯선 공기를 가르는 음악과 여행을 부추기는 영상이 흘렀다. <비긴어게인2>의 두 팀을 따라 포르투갈로 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
도우루 강 따라 낭만이 흐르는 항구도시, 포르투
20시간 넘는 비행으로 리스본 공항에 도착한 김윤아와 이선규, 윤건, 로이킴은 다시 차를 타고 포르투갈 제 2의 도시, 포르투(Porto)로 향한다. 대서양으로 흘러드는 도우루 강 하구에 위치한 항구도시다. 포르투갈 국가명도 이 도시에서 유래했을 만큼 오래 전부터 무역항으로 발달했다. 수백 년 전 탐험가들이 미지의 세계를 향해 기나긴 항해를 떠났던 곳도 포르투를 가로지르는 도우루 강변이다. 대항해 시대의 영화는 강물처럼 흘러갔지만, 그 시절의 정취는 도우루 강변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비긴어게인2> 첫 회, 어둠이 내려앉은 포르투에서 첫 버스킹 장소로 도우루 강변이 등장했다. 길 끝자락 아련한 불빛이 자우림과 윤건, 로이킴을 반겼다. 조금 더 걷자 마법처럼 탁 트인 강변이 나타났다. 포르투를 남북으로 가르는 도우루강 위 아치를 그리며 서 있는 루이스 1세 다리의 조명이 금빛 찬란했다. 히베이라 지구다. ‘히베이라’는 포르투갈어로 강변이라는 뜻이다. 히베이라 지구 중심에 도우루 강과 루이스 1세 다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히베이라 광장이 있다. 히베이라 광장부터 강변으로 이어지는 산책로에는 노천카페와 레스토랑이 즐비하다. 아무리 바람이 찬 밤에도 많은 사람이 야경을 보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버스커들의 핫스팟이기도 하다. 자우림과 윤건, 로이킴도 히베이라 강변에 악기를 세팅하고, ‘Fly me to the Moon’, ‘Gravity’ 등을 불렀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음악으로 공감대를 형성한 밤, 김윤아의 목소리가 애잔하게 강가에 울렸다.
아르누보 양식 외관이 아름다운 렐루 서점.
히베이라 강변에서 다시 도시를 향해 오르막길을 오르면 미로 같은 골목이 이어진다. 골목 안 오래된 건물들은 그 양식도 다양하다. 어디선가는 고소한 음식 냄새가 나고, 또 어디선가는 오래된 책 냄새가 난다. 고개를 들어보면 깃발처럼 빨래가 나부낀다. 그렇게 골목 내음이 난다. 그 길을 지나 광장에 닿으면 시청과 클레리구스 탑(Torre dos Clerigos) 등 세월의 흔적을 온몸으로 껴안고 있는 건축물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클레리구스 탑 가까이에는 아르누보 양식의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렐루 서점(Livraria Lello)'이 있다. 조앤 K. 롤링이 쓴 <해리포터> 속 마법 학교의 계단에 영감을 준 장소로 유명한 곳이다. 해리포터 팬들에겐 성지로 통할 정도다. 요란하게 기념사진만 찍고 가는 사람들이 늘어난 바람에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한다. 책을 사면 입장료를 돌려받을 수 있다. 버스킹 공연 전 렐루 서점에 들른 김윤아는 마법 노트를 사 멤버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다들 곡 작업 중이니까 이 노트에 좋은 곡 많이 쓰세요.”라고 말하며.
왕가의 여름 궁이 있던 휴양지, 카스카이스
김윤아와 버스킹 멤버들이 포르투의 버스킹을 마무리 하고, 리스본 가는 길에 들렀던 카스카이스는 포르투갈의 이름난 휴양지다. 해변이 아름다운데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씨를 뽐내는 까닭이다. 어딜 가나 청명한 하늘 아래 푸른 바다가 일렁인다. 늦은 밤, 김윤아-이선규, 윤건-로이킴이 각각 짝을 이뤄 노래하던 노란색 고풍스러운 건물 사이를 걷다 보면 그림 같은 해변이 나타나곤 한다.
카스카이스에는 페스카도레스, 레이나, 콘세이사오, 두케사 총 네 개의 해변이 있다. 그 중 카스카이스 한가운데 위치한 페르카도레스 해변(Praira dos Pescadores)은 수심이 얕고 백사장이 넓다. 그저 해변에 누워 작열하는 태양아래 몸을 맡기기만 해도 마음의 주름이 쫙 펴지는 듯하다. 넷 중 가장 호젓한 해변은 레이나(Praira da Raninha)다. 레이나는 9세기 아멜리아 여왕 전용 해변으로 쓰여 ‘여왕’이란 이름을 얻었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예쁜 초승달 모양 해변이 펼쳐진다.
사실 누구보다 먼저 카스카이스의 매력을 알아본 이는 포르투갈 왕족이었다. 포르투갈의 마지막 왕 카를로스 1세는 이곳에 여름 궁전을 두었다. 그로 인해 카스카이스 항구도 해양 스포츠의 거점으로 발달했다. 항구를 가득 채운 각양각색의 요트가 운치를 더한다.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은 7개의 언덕으로 이뤄진 도시다. 대서양으로 흘러드는 테주 강가에 자리한 코메르시우 광장에서 호시우 광장을 잇는 8월의 거리를 제외하면 평지를 찾아보기 힘들다.
마침내 리스본에 도착한 김윤아-이선규-윤건-로이킴이 첫 버스킹 장소로 택한 곳은 포르투갈어로 ’무역’이란 뜻의 코메르시우 광장이다. 한때 상인들이 오가던 무역 부두에서 얻은 이름이다. 광장 중앙에는 대지진 이후 폐허가 된 리스본을 폼발 후작과 함께 재정비하고 개혁한 호세 1세의 동상이 서있다. 동상 뒤로 과거의 영광을 조각으로 새겨놓은 개선문, 그 뒤로는 8월의 거리가 차례로 이어진다.
한편, 갈매기 울음 소리가 번지는 테주 강은 바다처럼 드넓다. 서쪽 하늘로 해가 저물 무렵이면 강가에는 작은 모래밭이 드러나는데 그 위를 거닐기 좋다.
두 팀 모두 버스킹을 펼친 알파마(Alfama)는 리스본에서도 가장 높은 지역이다. 워낙 지대가 높아 1755년 리스본을 강타한 대지진에도 무너지지 않아 옛 모습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다. 알파마 초입에는 리스본 대성당이 있다. 노란 빈티지 트램이 대성당 앞을 지나는 풍경은 엽서에도 자주 등장하는 리스본의 대표 이미지다. 대성당 옆길로 올라야 비로소 진짜 알파마가 시작된다. 구불구불한 언덕을 따라가면 골목이 얽히고설킨 미로처럼 이어진다. 골목 안에는 알록달록한 집들이 빼곡하다. 창문마다 빨래가 바람에 나부끼고 어디선가 파두 가락이 흘러나온다.
‘파두’란 리스본의 서민들 사이에서 생겨난 포르투갈의 민요로 서민 삶의 애환을 담은 가사와 가슴을 파고드는 애잔한 가락이 특징이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파두에서 왠지 모를 서글픔이 느껴지는 이유로 ‘사우다데(Saudade)’를 꼽는다. 사우다데는 한국인의 ‘한’처럼 다른 언어로 번역하기 힘든 포르투갈 고유의 정서를 말한다. 굳이 해석하면 ‘간절한 바람’이라고 한다. 예부터 서민들의 터전이었던 알파마 골목 안에는 파두 하우스가 많다. 박정현, 하림, 수현을 가장 긴장하게 했던 공연 장소도 파두 하우스도 아마 알파마 어디쯤이었을 것이다.
▲ 리스본을 내려다 보면 노천 카페에서 쉬어가기 좋은 그라사 전망대.한편, 알파마에는 탁 트인 전망을 선사하는 전망대도 군데군데 있어 보물찾기를 하듯 찾아내는 재미가 있다. 전망대란 뜻의 미라도루(miradouro) 표지판만 잘 따라 가면 숨은 보물 같은 풍광을 발견하게 된다. 그 중 최고는 포르타스 두 솔 전망대. 비긴어게인의 두 팀 모두 버스킹을 펼쳤던 공간이기도 하다. 헨리와 수현은 마지막 날 이곳을 찾아 제이슨 므라즈의 'I’m Yours'를 부르며 마지막 여정의 아쉬움을 달랬다. 포르타스 두 솔 전망대에 서면 푸른 테주 강과 오렌지색 지붕 위로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상 빈센테 드 포라 수도원, 판테온의 하얀 돔이 고개를 삐죽 내밀며 황금 비율로 어우러진다.
박정현-하림-헨리-수현 팀이 또 다른 공연을 선보인 곳은 ‘그라사 전망대’다. 앞으로는 상 조르제성과 테주강이 펼쳐지고 뒤로는 소나무 아래 노천카페의 분위기가 꽤 활기차다. 테이블이 자리를 잡고 시원한 맥주 한 모금을 들이키면 언덕 위의 낭만은 배가 된다.
상 조르지 성에서 내려다 본 전경.
알파마에 저녁이 찾아오면 상 조르지 성으로 가야 한다. 언덕 위에서 리스본 시내를 굽어보는 상 조르지 성은 11세기에 포르투갈을 점령한 아랍인들에 의해 세워졌다. 세월의 풍파에 성은 대부분 훼손됐지만, 단단히 쌓은 성벽은 고스란히 남아있다. 성벽을 따라 한 바퀴 돌면 구불구불 미로 같은 알파마의 골목길, 테주강을 가르며 코메르시우 광장으로 다가오는 페리, 그라사 전망대, 강 건너 알마다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R&B 요정' 박정현, '악기장인' 하림도 리스본을 떠나기 전 자유시간에 이곳을 찾았다. 때 마침 서역은 석양에 물들 무렵이었다. 두 사람은 성벽에 빌트인 가구처럼 장착된 의자에 앉아 황홀한 노을을 감상하며 포르투갈에서의 마지막 순간을 아쉬워했다. 붉게 물든 리스본의 전경에 취한 두 사람은 이윽고 노래를 시작했다. 하림은 우쿨렐레를 연주하고 박정현은 그에 맞춰 마이클 잭슨의 'Smile'을 불렀다. 환상의 하모니를 뽐내는 두 사람의 어깨 위로 금빛 찬란한 햇살이 내려 앉았다. 마치 ‘수고했다, 지금 이순간을 즐기렴.’ 이라며 토닥거리듯이.
글 / 사진 우지경
우지경은 여행의 경험을 글과 사진으로 나누며 살고 있다. <포르투갈 홀리데이>, <배틀트립> 등 여행책을 여러권 썻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