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Love'있다, 슬로베니아
'시간을 거슬러 다시 시작된 운명적 사랑'이란 슬로건을 내건 드라마 '흑기사'의 촬영지가 슬로베니아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에게 조금은 낯선 나라, 슬로베니아(Slovenia). 그 이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Love'가 우연을 가장한 운명처럼 숨어있다. 슬로베니아에서 흑기사를 만나긴 어려워도, 누구라도 슬로베니아와 사랑에 빠지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시간이 멈춘 듯한 풍경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세계를 보다
글_우지경 / 사진_이두용
내 안에 'Love'있다, 슬로베니아
'시간을 거슬러 다시 시작된 운명적 사랑'이란 슬로건을 내건 드라마 '흑기사'의 촬영지가 슬로베니아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에게 조금은 낯선 나라, 슬로베니아(Slovenia). 그 이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Love'가 우연을 가장한 운명처럼 숨어있다. 슬로베니아에서 흑기사를 만나긴 어려워도, 누구라도 슬로베니아와 사랑에 빠지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시간이 멈춘 듯한 풍경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흑기사 따라 슬로베니아 가볼까?
KBS2 드라마 '흑기사'의 해외 촬영지, 동유럽의 작은 나라 슬로베니아가 화제다. 200여 년에 걸친 사랑 이야기를 그린 판타지 로맨스의 주인공 김래원(문수호 역, 이하 수호)과 신세경(정해라 역, 이하 해라)의 케미도 기대를 모았지만, 드라마 1, 2회의 배경으로 등장한 촬영지 동화 같은 슬로베니아의 이국적인 풍경은 시선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여행사 직원 해라가 느닷없이 슬로베니아로 출장을 가게 되고, 류블랴나에서 만난 수호를 포토그래퍼로 착각해 함께 블레드부터 피란까지 슬로베니아의 구석구석을 여행하는 에피소드가 펼쳐졌다. 고성과 호수의 신비로운 분위기도 판타지 멜로라는 장르와 잘 맞아 떨어지며 더욱 관심을 끌었다. '흑기사' 의 두 주인공 해라와 수호의 발자취를 따라 슬로베니아로 여행을 떠나보자.
은은한 불빛이 일렁이는 류블랴나의 밤 해라가 와인 잔을 수호에게 건네며 말한다. “흑기사! 제가 이 잔 까지 다 마셔버리면 너무 붕 뜰 것 같아가지고요, 그럼 제가 현실로 돌아갈 때 너무 슬프잖아요.”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는 그런 곳이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워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도시.
슬라브어로 '사랑하다(Ljubiti)'는 단어에서 유래한 이름처럼 거리 곳곳에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류블랴나 성 아래로 류블라니차 강이 유유히 흘러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가른다. 밤이면 강을 따라 늘어선 아르누보풍 건물에 자리한 노천카페가 더욱 로맨틱해진다.
해라처럼 황금빛 야경을 바라보며 와인을 홀짝인다면 시간을 그대로 멈추고 싶어서, 처음 만난 이에게 흑기사가 되어달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 잔을 받아든 수호처럼 '마실 순 있는데, 그러면 나랑 늦게까지 있어야 해요.' 라고 속마음을 툭 말해버릴 수도.
류블라니차 강 위에 놓인 다리는 밤낮으로 저마다 다른 매력을 발산한다. 그 중 수호와 해라가 우연히 만난 메사르스키 다리에는 수많은 연인이 남긴 '사랑의 자물쇠'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다리 건너 국민 시인 프란체 프레셰렌의 이름을 딴 프레셰렌 광장에도 애잔한 사랑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광장 한가운데 동상으로 남아있는 프레셰렌의 시는 슬로베니아 국가로 쓰이며, 그가 세상을 떠난 날은 공휴일로 지정될 만큼 존경 받는 인물이다. 이런 시인에게도 가슴 아픈 사랑이 있었으니, 동상의 시선이 향하는 노란 건물 창가에 새겨진 조각상이 그 주인공 율리아다. 프레셰렌은 율리아와 신분과 나이차 때문에 고백도 못 해본 채 48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사람들이 둘의 동상을 마주 보게 설치했단다.
고성과 호수의 신비로운 기운이 가득한 블레드
“우리 헤어지게 되면 크리스마스에 여기서 만나.” 어린 시절, 해라가 가리킨 손가락 끝 엽서 속에는 동화에서 툭 튀어나온 듯한 고성이 있다. 순정파 수호는 그 약속을 지키려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고성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그러던 두 남녀가 거짓말처럼 만나, 함께 블레드 호숫가를 거닐게 된다.
슬로베니아 북쪽의 블레드는 티 없이 맑은 빙하 호수 위에 작은 섬이 떠 있고, 호숫가 깎아지른 절벽 위엔 그림 같은 성이 있는 작은 마을이다. 블레드 성은 슬로베니아에 가장 오래된 고성으로 1004년 독일 황제 헨리 2세가 축조했다. 성 꼭대기 발코니에서 서면 우람한 산맥에 폭 안긴 호수가 그림처럼 내려다보인다. 그 풍경 속에 한 템포 쉬어 가고 싶다면, 야외 테라스에 앉아 티타임을 가져도 좋다. 드라마에서도 해라가 야외 테라스에 앉아 티타임을 즐기는 장면이 나온다.
드라마와 달리 성안에는 박물관과 예배당, 중세 모습을 재현한 상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김래원의 외모에 버금가는 청년이 전통 방식으로 편지지를 만들어주는 인쇄소, 대장장이가 칼을 가는 대장간, 수도사 옷을 입은 노인이 칼로 와인 병을 여는 시연을 선보이는 와인셀러 등의 가게가 새로운 즐거움을 선사한다.
블레드 성만큼이나 호수 위의 블레드 섬도 특별하다. 특히, 전통 나룻배 플레트나(Pletna)를 타고 블레드 섬으로 떠나는 뱃놀이도 낭만을 더한다. 플레트나 역사는 무려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슬로베니아를 지배한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허락한 단 23척의 배만 블레드 섬을 오갔는데, 지금도 그 대를 이어 노를 젓는 뱃사공이 대부분이다.
플레트나를 타고 블레드 섬으로 가는 길, 서글서글한 청년 뱃사공은 들려주는 노래가 낭만을 더한다.
배에서 내려서면, 섬 초입의 99개의 계단 위 성모 승천 성당(Pilgrimage Church of the Assumption of Maria)이 고개를 내민다. 성모 승천 성당은 유럽인들이 결혼식을 올리고 싶은 10대 성당으로 뽑히기도 했다. 신랑이 교회까지 신부를 안고 99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백년해로한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한편, 성당에선 결혼식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늘 청아한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제단 앞에 줄을 당겨 '행운의 종'을 세 번 울리면 소원을 이뤄진다는 얘기가 전해오기 때문이다. 단, 3가지 조건이 있다. 현실적일 것, 긍정적일 것, 절대로 타인에게 소원을 말하지 말 것.
동굴이야? 성이야? 프레드야마 성
'가까이서 보니까 더 예쁘네요. 코트가.' 라는 심쿵 멘트를 날리며 수호가 해라의 사진을 찍어 주던 장소를 기억하는지? 자주빛 코트를 입은 해라 뒤로 동굴 반, 성 반 오묘한 풍경이 펼쳐진다. 그곳의 정체는 포스토이나의 프레드야마(Predjama) 성이다. 800년 전 동굴을 부수지 않고 그 앞에 성을 세워 한쪽 벽은 자연 동굴 그 자체다. 가까이서 보면 더 예쁘고 신비롭다.
▲ 동굴을 허물지 않고 그 앞에 성을 세운 프레드야마 성.프레드야마 성에 깃든 이야기도 흥미롭다. 15세기에 이 성은 여왕의 미움을 산 기사, 에라젬 프레마스키의 은신처였다. 병사들의 포위에도 1년 넘게 성에 숨어 지냈다. 식량이 떨어지면 밖으로 나오겠지 하는 마음에 병사들이 진을 치고 기다렸지만, 동굴 지형을 활용해 마을에서 식량을 조달받고, 식수는 동굴 벽에서 흐르는 물을 받아서 마시며 살아남았다. 하지만 허무하게도 한 하인의 배신으로 화장실에서 살해당하고 말았다. 하인이 병사들에게 그의 위치를 불빛으로 알려 돌 포탄을 쏘게 한 것. 증명이라도 하듯 성 안에는 당시 포탄으로 썼던 돌덩이가 놓여 있다. 한편, 계단을 따라 성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습한 기운이 흐르는 동굴과 이어진다. 동굴 쪽에서 밖을 바라보면 마치 액자를 짜 맞춘 듯 동굴 너머 펼쳐지는 마을 풍경이 근사하게 다가온다.
아이스크림 보다 달콤한, 피란
수호와 해라가 데이트를 즐긴 또 다른 장소는 피란이다. 온종일 가이드와 사진 촬영을 해준 수호에게 고마워서 아이스크림을 사겠다는 해라가 아름다운 풍경 속에 있는 게 너무 좋아서 왈칵 울음을 터트린 곳이기도 하다.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다운 피란은 대체 어떤 곳일까. 피란은 아드리아 해를 사이에 두고 이탈리아, 크로아티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아담한 항구 도시다. 선착장을 지나 타르니티 광장에 들어서면 파스텔 빛 중세 건물이 고아한 자태를 뽐낸다. 빨래가 나부끼는 골목 어디선가 이탈리아어가 들려온다. 오래 전 베네치아 공국의 지배를 받은 탓에 피란 주민의 대부분이 이탈리아어에 능통하다. 언덕 위의 성 조지 대성당에 오르면, 주홍 지붕 너머 푸른 바다가 출렁이는 환상적인 풍경에 가슴이 차오른다.
피란 어디서 봐도 하늘을 찌를 듯 뾰족한 첨탑이 눈에 띈다. 자세히 보면 종탑 꼭대기에 대천사 미카엘 동상이 도시를 보살피기라도 하듯 굽어보고 있다. 이곳이 바로 피란에서 가장 아름다운 전망을 선사하는 조지 대성당이다. 1344년 피란의 수호성인, 성 조지를 기념해 세웠으며 1637년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을 결합한 건물로 재건됐다. 전망대가 있는 1608년 종탑은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광장에 있는 붉은 종탑을 본떠 만들었다. 종은 오후 2시 정각에 울리는데 종탑까지 굳이 오르지 않더라도 성당 앞 광장에 서면 타르티니 광장이 한눈에 쏙 담긴다. 오렌지 색 지붕 너머로 노을이 바다를 적시면, 그 앞에 있는 여행자의 가슴이 뛴다. 마치 울면서 아이스크림 먹는 해라를 바라보며 설레했던 수호처럼.
글 / 우지경
우지경은 숨은 보석 같은 여행지를 발견할 때 희열을 느끼는 여행작가다. 그녀는 슬로베니아를 죽은 연애세포도 환생시킬 로맨틱 여행지로 꼽는다.
사진 / 이두용
따뜻한 시선으로 여행지를 담아내는 감성사진사다. 그는 지난 해 숱한 여행 중 슬로베니아에서 사진을 찍을 때 가장 설렜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