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아름다운 섬, 가라치코에 차린 ‘윤식당’이 성황리에 영업을 종료했다. 도시를 떠나 작은 마을에서 식당을 함께 꾸리던 윤여정, 이서진, 정유미, 박서준의 좌충우돌 여정도 이로써 끝이 났다. 하지만 일에 치이거나 일상에 무뎌질 때면, 그들처럼 가라치코로 떠나는 꿈을 종종 꾸곤 한다. 낯선 세상에 새로운 존재로 발을 내딛는 꿈을.
세계를 보다
‘윤식당2’의 네 배우처럼
행복을 찾아 떠난 스페인 남부 여행
글 / 사진 우지경
윤식당의 그림 같은 무대, 가라치코
네 배우가 작은 한식당을 운영하는 과정을 그린 예능 '윤식당2'의 무대는 가라치코다. 가라치코는 스페인 남부 카나리아 제도 테네리페섬 북부 연안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한국인에겐 낯설지만 유럽인들 사이에선 휴양지로 널리 잘 알려져 있다. 섬 전체 인구는 5천 명인데 반해, 연간 방문하는 여행객은 5백만 명 수준이라고 한다. 지리적으로는 스페인 본토보다 북아프리카 모로코와 가깝다. 연중 기온은 20도로 한겨울에도 평균 10도를 유지해 계절에 상관없이 여행하기 좋은 곳이다. 겨울에 수영을 즐길 수도 있다. 그래서 테네리페섬 앞에는 ‘영원한 봄을 간직한 곳’, ‘유럽의 하와이’ 같은 수식어가 늘 따라붙는다.
처음 발을 디딘 여행자 눈에는 화산 분화 인해 생겨난 ‘엘 칸레톤’이라는 천연 수영장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행복한 표정으로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도 좋지만, 얼른 물 속으로 풍덩 뛰어 들고 싶어진다. 벼랑을 따라 조성된 산책로는 또 얼마나 신비로운지. 해안의 거친 바위와 화산암 웅덩이와 푸른 바다처럼 남다른 자연경관을 넋을 잃고 바라보게 된다. "진짜 멋있다. 하늘 섬에 있는 느낌이다. 장관이다”라며 감탄했던 박서준처럼 말이다. 천연 수영장 옆에는 ‘카스티요 산 미구엘’이란 요새가 서 있다. 화산 폭발에도 살아남은 건물 중 하나로 16세기 해적으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해 지었다. 요새만큼이나 오래된 건물, 1524년에 지은 프란체스코회 수도원도 조우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국적인 경치보다 마을 사람들의 일상에 눈길이 간다. 활기차게 아침을 열고 리드미컬하게 반복되는 일상을 이어가는 주민들의 모습에서 사람 사는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마을 중심 새하얀 산타 아나 교회 광장에서 광합성을 하며, 저녁 무렵 오늘은 어느 식당에서 밥을 먹을까 궁리하는 게 즐거워진다. 마치 ‘윤식당2’의 출연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슬며시 가라치코 마을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고 싶다고 할까?
사실 윤식당이 한식이라는 낯선 메뉴로 가라치코에서 인기를 끌은 데에는 네 배우의 호흡과 노력도 컸지만, 동네 사람들의 공도 못지않았다. 주민들이 자진해서 입소문을 낸 덕에 점점 손님들이 더 몰려고 지역 일간지에 기사까지 실렸다. 출연자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마을 사람들에게 동화돼 스스럼없이 인사를 하며 함께 어우러지는 훈훈한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니 가라치코에선 윤식당의 네 배우들처럼 집을 빌려 머무는 여행을 하길 권한다. 박서준처럼 아침 운동을 하고, 정유미처럼 장을 보는 소박한 행복 말이다. 그렇게 스페인의 봄 속으로 스며들어 보자. 스페인 남부에는 가라치코만큼이나 따스한 기운을 간직한 소도시도 많다.
절벽 위 하얀 마을, 론다
가라치코가 화산섬에 둥지를 큰 작은 마을이라면, 론다는 아찔한 절벽 위의 마을이다. 120m 깊이의 타호 협곡 위에 조성된 론다는 절벽의 양어깨 위에 새하얀 집들이 날개처럼 얹혀 있는 모양새다. 깎아지른 절벽 사이 협곡에는 ‘누에보 다리(Puente Nuevo)’가 세워져 있다. 신시가와 구시가를 잇는 이 아치형 다리는 18세기 말 42년에 걸쳐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 올린 끝에 완성됐다. 봄이면 누에보 다리 아래 ‘명랑, 쾌활’이란 꽃말을 가진 노란 유채꽃이 활짝 피어난다. 협곡 아래에 서면 누구나 누에보 다리를 우러러보게 된다. 다리 밑 가는 물줄기는 낭떠러지로 곤두박질치고, 유채꽃은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미풍에 한들거린다. 자연과 사람이 빚어낸 경이로운 풍경 속에 마냥 머물고 싶어진다.
이 곳을 ‘연인과 로맨틱한 시간을 보내기 가장 좋은 곳’이라 예찬했다. 그는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도 이곳에서 집필했다. 론다에는 ‘헤밍웨이의 산책로’가 남아있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가파른 절벽 위에 위치한 론다 전망대도 만날 수 있다. 전망대에 서면 협곡 반대편에는 올리브 농장과 구불구불한 시골길이 어우러진 광활한 대지가 한눈에 담긴다. 입이 쩍 벌어지는 전망이다. 해 질 무렵, 거리 악사의 아코디언 연주까지 더해지면 로맨틱한 분위기가 한층 무르익는다. 헤밍웨이의 말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더 없이 낭만적이다. 산책로의 끝에는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투우장이 자리한다. 신고전주의 양식 건물로 스페인 투우장 중 아름답기로 손꼽힌다. 헤밍웨이가 피카소와 함께 직관을 즐기던 투우장이기도 하다. 투우장 앞에는 18세기 근대 투우의 창시자 프란치스코 로메로의 동상이 서 있었다. 론다 출신인 그는 ‘물레타(muleta)’를 고안하며 투우를 예술로 승화시켰다고 평가 받는다.
누에보 다리, 론다 전망대를 차례로 둘러본 후엔 구시가로 향해 본다. 가로수로 심어놓은 오렌지나무 아래를 지날 때마다 은은한 오렌지 꽃향기가 난다. 유난히 오렌지 나무가 많은 스페인 남부에서 맡을 수 있는 봄의 향기다. 구시가로 접어들면 미로 같은 골목이 이어진다. 골목에서 마주친 마을 사람들은 낯선 이방인에게도 “올라(스페인어로 ‘안녕’)”라고 인사를 건넨다. 당황하지 말고 미소 띤 얼굴로 말해보자. “올라!” 그 순간 론다의 사람과 조금씩 가까워질 테니. 그런 다음 골목 안 작은 식당에 자리를 잡고 고트 치즈나 빠에야 같은 로컬 음식에 와인 한 잔을 곁들며 한 접시의 행복을 천천히 음미 해보자. 윤식당의 손님들처럼.
축제로 물든 세비야의 봄
‘스페인’하면 떠오르는 플라멩코, 시에스타, 축제는 어딜 가야 볼 수 있을까? 정답은 바로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의 주도, ‘세비야’에 있다. 세비야의 열정은 플라멩코 리듬을 타고 흐른다. 플라멩코의 본고장답게 ‘타블라오(Tablao)’라는 공연장부터 플라멩코 박물관까지 도시 곳곳에서 플라멩코를 접할 수 있다. 로그 가요스, 엘 아레날 등 내로라하는 타블라오는 산타크루즈 지구에 포진해 있다. 산타크루즈 지구의 골목 안 상점마다 파는 기념품도 플라멩코 드레스, 머리핀, 부채, 구두, 인형이 대부분이다.
플라멩코 말고도 볼거리가 무궁무진하다. 1492년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가 항해를 떠난 곳이 세비아 아니던가. 그가 출발 전 후원자인 스페인 국왕을 알현했던 곳이 바로 세비야의 알카자르다. 알카자르는 요새가 있던 자린데 이슬람 문화에 심취한 페드로 1세가 그라나다 알람브라 궁전을 본 따 무데하르 양식의 궁전 알카자르를 지었다. 정교한 아라베스크 문양 세공이 돋보이는 대사의 방은 무데하르 양식의 걸작으로 꼽힌다. 궁전 건물도 아름답지만, 야자수와 열대 식물이 가득한 초록의 정원은 더욱 이국적인 풍경을 빚어낸다.
알카자르 맞은편에는 바티칸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세비야 대성당이 있다. 이슬람 사원으로 지은 건물을 백 년에 걸쳐 개조하여 이슬람 양식과 고딕, 르네상스 양식이 오묘한 조화를 이룬다. 그 가운데 히랄다 탑과 오렌지 나무를 촘촘히 심어놓은 오렌지 정원은 이슬람이 남긴 흔적이다. 세비야 대성당 안에는 콜럼버스의 관도 안치돼 있다. 관 위의 조각상 오른발을 만지면 다시 세비야에 오게 된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세비야에 처음 갔을 때, 나는 그 조각상의 발을 붙잡고 이왕이면 오렌지 꽃 필 무렵에 다시 오게 해달라고 빌었다. 2년 뒤 오렌지 꽃향기가 은은하게 번지는 4월의 세비야에 다시 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 4월의 축제에서 만난 춤추는 세비야의 여인들
매년 부활절 2주 후 월요일 자정부터 일요일 자정까지 ‘페리아 데 아브릴(Feira de Abril, 4월의 축제)’가 이 열린다. 워낙 규모가 크고 볼거리가 많아 3월 중순 발렌시아에서 열리는 ‘불 축제’, 7월 초부터 중순까지 열리는 ‘팜플로나의 산 페르민 소몰이 축제’와 더불어 스페인 3대 축제 중 하나로 꼽힌다. 세비야를 가로지르는 과달키비르 강변의 광장에 가설 천막, 카세타(Caseta)가 300여 채 세워지고, 사람들은 한껏 치장을 하고 그곳에 모여 술과 음식과 풍성한 대화 그리고 플라멩코 춤을 즐긴다. 4월에 세비야에 가게 된다면, 4월의 축제에서 해피니스 호르몬 세로토닌 수치를 높여보자. 기념품 가게에서 꽃 머리핀을 사서 꽂고 카세타를 기웃거리다 보면, 흥겹게 춤을 추던 사람이 말을 걸어올지도 모른다. 이리 들어오라며 달콤하고 청량한 맛이 매력적인 레부히토(화이트 와인에 사이다를 섞은 축제용 술)를 건넬 수도 있다. 이방인은 환대하는 사람들과 레부히토, 그 외 더 바랄 것이 있을까? 도저히 못 이기는 척 함께 춤을 추며 스페인의 봄날을 만끽해보시길.
글 / 사진 우지경
봄을 사랑하는 여행작가다. 스페인에서 맞이한 두 번의 봄을 그리워하며 다시 떠날 계획을 세우는 중이다.